화합의 철학
코끼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장님들이 각각 코끼리 몸을 한 부위씩 만져보았습니다. 다리를 만져본 장님은 코끼리가 마치 기둥과 같다고 생각하였고, 기다란 코를 만져본 장님은 마치 뱀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상아를 잡은 장님은 단단하고 매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귀를 잡은 장님은 얇고 넓은 부채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님들은 만져본 부위에 따라 코끼리를 서로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모두 같은 코끼리를 두고 말입니다. 크고 작은 이견들은 어디에서나 있습니다. 불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부처의 가르침이라는 거대한 코끼리를 두고 후대인들은 각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위를 내세웠습니다. 당연하게도 수많은 종파를 만들어냈습니다.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며 상대를 헐뜯기도 했습니다.
서기 7세기, 한반도에 어떤 승려는 생각했습니다. 같은 부처님 가르침 앞에서 왜 자기들 주장만 옳다고 여기는지 고민했습니다. 모습은 달라 보일지언정 다른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는 논쟁을 화합으로 바꾸고자 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까요. '원효'는 화합의 철학을 펼쳤습니다.
원효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입니다. 법명이며, 이른 새벽이라는 뜻입니다. 불교를 빛나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속성은 설 씨이며, 이름은 사례입니다. 617년부터 686년까지 살았습니다.
원효는 현재의 경북 경산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귀족 출신이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다양하게 학문을 배웠습니다. 특히 그는 화랑 출신으로 무예가 출중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출가한 원효
이른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원효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것이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원효는 15살 때 출가를 결심하게 됩니다. 원효는 특별히 스승을 두지 않고 돌아다녔습니다. 여러 승려들을 만나며 배우고, 스스로 경전을 공부하고 해석했습니다. 그럼에도 공부에 목이 말랐던 그는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고자 마음먹었습니다. 후배이자 친구인 의상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의상은 원효보다 8살 아래였습니다. 의상 또한 원효처럼 화랑 출신이었지만 불교에 뜻을 두어 출가한 인물입니다. 둘이 언제 만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유학길은 험난하고 위험했습니다. 그럼에도 원효와 의상은 고구려를 거쳐 육지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요동까지 이르렀을 때 결국 고구려 군사들에게 붙잡힙니다. 첩자로 오해받아 며칠을 갇혀있다가 다행히 풀려났고, 그대로 신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10년 정도가 흐른 뒤, 원효와 의상은 다시 유학길에 도전합니다. 이번에는 육지가 아닌 바다로 건너가려고 했습니다. 가던 중 그들은 잠시 비를 피할 곳은 찾았습니다. 동굴처럼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자고 있던 원효는 목이 말라 잠시 일어났다가 주변에 물이 담긴 바가지를 발견했고 그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잠들었습니다. 아침이 되어 날이 밝자, 원효는 깜짝 놀랐습니다. 동굴은 무덤이었고 자신이 들이켰던 물은 해골에 고여있던 물이었죠. 그제야 원효는 구역질을 하며 괴로워했습니다. 그 순간 원효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밤에 마시고 달게 느껴졌던 물이 사실은 해골에 고여있던 물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나서야 더럽다고 생각했습니다. 해골물은 달라진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원효대사의 유명한 일화인 해골물 이야기는 꾸며진 것으로 보입니다. [송고승전]에는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효는 마찬가지로 동굴에서 잠을 잡니다. 다음 날 동굴이 아닌 무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가 많이 와 할 수 없이 또 무덤에서 잠을 잤는데 무덤이란 걸 알고나 선지 악몽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무덤이란 사실은 처음부터 변하지 않았는데 오로지 내 마음 때문에 악몽을 꾼 것이었습니다. 원효는 깨달은 후 시를 한 편 짓습니다.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갖가지 법이 사라진다."
어떤 이야기든지 중요한 핵심은 바로 무엇이든 마음먹기 달렸다는 깨달음입니다. 원효는 깨달음을 얻은 후 당나라 유학을 포기합니다. 배움에는 안과 밖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같이 동행했던 의상은 그대로 당나라로 떠났습니다.
파계승
신라에 돌아온 원효의 모습은 이전과 달랐습니다. 머리와 수염을 기르며 승려로서의 구색은 점점 옅어져 갔습니다. 꺠달은 그는 일부러 승려 행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원효는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준다면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세우리라."라는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다들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당시 무열왕이었던 김춘추는 이 말의 뜻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딸인 요석공주를 원효와 만나게 합니다. 원효와 요석공주는 만나 서로 사랑을 나눴습니다. 파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그로 인해 설총이라는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설총은 훗날 훌륭한 유학자가 됩니다. 원효는 아들이 생겼지만 집을 나와 다시 떠돌아다녔습니다. 원효는 언제나 백성들과 함께였습니다. 그리고선 자신을 '소성거사'라 말했습니다. 거사는 출가하지 않고 불법을 배우는 사람을 뜻합니다. 거기에 스스로를 낮추어 소성거사라 칭한 것입니다. 일반 백성들과 어울리며, 귀족들이 원하는 고상한 승려의 모습은 없었습니다. 민중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술과 고기를 먹고 기생집도 드나들었습니다. 무엇에도 거리낌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다른 승려들은 계율을 어긴 원효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불교는 귀족들과 더 가까웠습니다. 어려운 말이 가득하고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에게 부처는 없었습니다. 원효는 어떻게 하면 대중들에게 부처를 알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염불에 운율을 넣어 노래로 만듭니다. 또한 누구나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원효는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서 대중교화에 힘썼지만, 경전해석에도 몰두한 교학의 대가였습니다. 원효는 수많은 경전을 해석에 자신의 사상을 키워나갔습니다. 파계로 다른 불자들에게 무시당하기도 했지만 부지런히 공부했기에 학문은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무려 85종 180여 권, 현재도 약 20여 권 정도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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