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와 손을 잡다
육손은 양주 오군 오현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대대로 강동에서 알아주는 명문가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육손은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증조부의 여강태수 육 강의 밑에서 자라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춘에 주둔하고 있던 원술이 서주를 공격할 때 써야 할 군량미가 필요하다며 육 강에게 쌀 3만 곡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당시 육 강은 위험을 무릅쓰며 유명무실한 상태에 있는 한나라 조정에 공물을 바치던 천하에 몇 명 남지 않은 한나라의 충신이었던 반면에 원술은 조정에서 보낸 사신을 감금할 정도로 한나라를 무시하는 반역자에 가까운 인물이었기에 육 강은 원술의 제안을 거절하며 혹시 모를 전쟁을 대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육 강은 육손과 자신의 아들 육적처럼 너무 어려서 전쟁에 참가할 수 없는 일족들을 고향인 오현으로 돌려보냈는데 육손이 육 강의 아들인 육적보다 나이가 더 많았기 때문에 육손이 가문을 맡아서 다스렸다고 합니다. 이후 원술을 손책을 보내 육 강을 공격하였고 육 강은 2년 동안 공격을 버텨냈으나 결국 전쟁을 원술의 승리로 끝나버립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전투를 치렀던 육속의 가문 사라마 백여 명 중 반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고 하며 육 강도 전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환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육손 입장에서 자신을 길러준 증조부와 가문 사람들을 죽인 원수였기 때문에 육손은 손책이 강동을 집권하고 있던 시기에는 어떠한 활동도 하지 않고 조용히 지냅니다.
손책이 죽은 뒤 모든 일을 통괄하게 된 손권은 오 지역을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지역을 원할하게 관리하기 위해서는 오 군의 대호족인 육씨 가문과의 악연을 풀고 사이좋게 지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손권은 육손에게 관직을 주며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 육손도 사실상 강동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손권과 척질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손권의 제안을 받아들여 21살 나이에 출사 하게 됩니다. 그리고 육손은 자신이 맡은 지역을 잘 다스려 백성들의 생활이 윤택해졌다고 하며 숨어서 사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펼쳐서 다스리는 백성의 수를 늘려 국력을 신장하려 하였고 여러 지역의 산적들을 토벌하여 치안을 안정시켰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육손의 활약을 본 손권은 육손의 재능이 매우 뛰어남을 알아차리고는 자신의 형인 손책의 딸을 육손과 혼인시켜 육손을 자신의 인척으로 만드니 이로써 손가와 육가는 과거의 원한을 잊고 하나가 됩니다.
관우 정벌전
육손은 육구에 도착한 다음 관우에게 서신을 보내 관우가 뒤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둬 우금을 자로 잡은 것을 칭송하였고 그를 존경하는 척했기에 육손의 서신을 본 관우는 그가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자신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크게 안심하고는 다시는 육손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완벽하게 방심을 하게 된 관우는 남군에 주둔시킨 병력을 빼서 번성으로 가게 하였고 그 사이에 육손은 모든 상황을 보고하며 관우를 사로잡을 수 있는 계책에 대해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관우가 상관의 마곡을 마음대로 취한 것을 기점으로 손권을 여몽과 육손을 선봉으로 삼아 그들에게 형주 지역을 공격하라 명했고 이에 여몽과 육손은 엄청난 속도로 공안과 남군을 점령했다고 합니다. 이후 여몽이 남군에 주둔하여 형주민들의 인심을 얻는데 주력하는 사이 육손은 별도의 군을 이끌고 계속 진군했다고 하며 그로 인해 의도태수 번우가 자신의 임지를 버리고 달아났기에 모든 성의 수령과 만 이의 우두머리들이 항복해 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육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진격하였고 장수 이이와 사정을 파견해 촉나라 장수 첨안과 진봉을 격파해 물리쳤고 방릉태수 등보와 남향태수 괄목의 군대도 박살 냈다고 합니다. 또한 자귀현의 대성인 문포, 들개 등이 이민족 병사 수천 명을 모아 서방과 머리와 꼬리의 관계가 되자 육손은 장수 사정을 통솔하여 문포와 등개의 군대를 공격해 격파해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포와 등개는 도망쳤고 이에 촉나라에서는 이들을 장수로 임명했으나 육손이 사람을 보내 이들을 회유하였기에 문포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돌아와 육손에게 항복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육손이 전후로 목을 베거나 포로로 잡거나 투항시킨 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육손은 투항한 자들에게 관직을 내리고 제대로 된 대우를 해줘서 그들이 불만을 가지지 않게끔 신경도 썼다고 하니 관우 정벌 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 여몽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육손도 그에 못지않는 활약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릉대전
황초 2년(221년), 드디어 유비가 관우의 복수와 형주의 수복을 위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무현과 자귀현에 주둔한 오나라 군대를 격파하며 진격해왔기에 순권은 육손을 대도독 가절로 임명하여 주연, 손환, 송 겸, 서성, 반장 등과 5만 명의 병사들을 지휘해 유비의 군대를 막으라 명합니다. 황무 원년(222년) 정월에 육손의 휘하에 있던 송겸 등이 촉의 둔영 5곳을 공격해 모두 무너뜨리고 그곳을 지키던 장수들을 죽였다고 하며 이에 유비가 이끄는 육군은 자귀현으로 다시 돌아갔으나 오반과 진식이 이끄는 촉나라의 수군은 오히려 물길을 따라 진격하여 이릉에서 장강을 끼고 동서 연안에 주둔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비는 그해 2월에 직접 장수들을 이끌고 다시 자귀현에서 나와 산을 타고 고개를 넘어 이도현의 효정이라는 지역에 주둔했다고 하며 무협과 건평에서부터 이릉의 경계까지 수십 개의 둔영을 연이어 세운 뒤 금, 비단, 작위, 상으로 이민족들을 선동했기에 무릉 지역의 오계만 이들이 유비에게 호응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유비는 오나라를 토벌하고 형주를 재탈활 할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시켜 나갔습니다. 육손이 대도독으로서 전군을 지휘하고 있었으나 장군들 가운데 어떤 이는 손책 때부터 활약한 노장이었고 어떤 이는 왕가의 일족이었기에 각자가 자존심이 있어 서로의 의견을 듣거나 따르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손권의 친족인 손환이 단독으로 이도현에 있는 유비의 선봉대를 공격하러 나섰다가 유비의 군대에게 포위되는 등 일선에 있는 장수들 중 일부는 육손의 명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육손은 더 이상 이들을 가만히 두었다간 군을 제대로 통솔할 수 없다고 여겼기에 모든 장수들을 불러 모은 뒤 칼을 어루만지며 '유비는 천하에 명성을 날리는 자로 조조도 그를 꺼려하는데 지금에서는 우리와 경계에 있으니 이는 강한 상대를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군들은 모두 국가의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히 서로 화목해야 하며 함께 적들을 제거해서 위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하는데 서로 온화하게 대하지 않고 있으니 그것을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또한 제가 비록 서생에 불과하나 주상의 명을 받은 상태이고 나라에서 제군들로 하여금 나에게 굽히도록 한 것은 제가 얼마 되지 않는 명성을 가지고 있으나 능히 치욕을 참아내고 중임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각자가 맡은 일이 있는데 어찌 다시 말을 하겠습니까. 또한 군령은 영원한 것이니 결코 법을 어길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장수들을 단속했다고 합니다. 이후 촉나라 장수 오반이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와서 평지에 진영을 세운 뒤 오나라 장수들에게 싸움을 걸어왔고 이에 모든 오나라 장수들이 출진하려 했으나 '이는 반드시 속임수일 것이니 우선 지켜보도록 합시다.'라고 말했는데 오서에 따르면 이러한 육손의 명령에 대다수의 장수들은 성을 내며 원통해했지만 아무도 육손의 명을 어기지 않았기 때문에 앞서했던 육손의 일갈이 효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육손의 예상대로 본래 유비는 8천 명의 병사를 매복시켜 놓은 뒤 오나라 군대가 공격해 오면 기습을 하려 했으나 오나라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대로 병사들을 물렸기에 이를 본 육손은 장수들에게 '제군들의 출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이처럼 반드시 교묘한 술책이 있을 거라는 걸 헤아렸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황무 원년(222년) 6월에 육손은 대치상황이 오래 지속되어 유비군이 지친 상태가 되자 공격에 나서려 했는데 휘하 장수들은 육손에게 '마땅히 유비를 공격하려면 처음에 했어야 했는데 지금은 5~6백리 안으로 들어와 대치한 지 7~8개월이나 되었고 그들은 요해지를 점거하여 굳게 지키고 있으니 필시 공격해 봤자 어떠한 이득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그러자 육손은 장수들에게 '유비는 교활한 적이며 많은 일을 경험했기에 그가 처음 병사들은 집결시켰을 때는 생각과 근심이 정교하고 전일하여 범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이곳에 주둔한 지 오래되었고 우리에게서 어떠한 것도 얻지 못했으니 적의 병사들은 피곤하며 의지가 꺾였고 새로운 계책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적들을 앞뒤에서 공격하는 것은 지금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는 유비군의 영채 한 곳을 공격하였는데 전황이 불리했다고 합니다. 이에 모든 장수들이 '병사들이 헛되이 죽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육손은 그들에게 '나는 이미 적을 격파할 방법을 훤히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뒤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각자 한 묶음의 풀을 지니도록 하여 화공을 썼는데 누런 기운이 자귀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서도 보였다고 하며 그 넓이가 수십 장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기점으로 형세가 이루어져 육손을 대대적으로 유비군 진영을 향한 공격을 퍼부었고 화공으로 인해 여러 지역에 퍼져 있는 유비군의 진영은 서로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각개격파당해 40여 곳의 진영이 무너지며 대도독 풍습, 선봉남 장난, 호왕 사마가 등이 목숨을 잃습니다. 하지만 유비는 포기하지 않고 마안산에 올라서 주위에 군대를 포진시키며 오나라 군대를 막으려 했으나 육손이 집적 군대를 지휘하고 병사들을 격려하며 사방에서 병사들을 진격시키자 마침내 유비의 진영은 무너지고 붕괴되어 결국 수만 명이나 되는 촉나라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이후 전투에서 패해 간신히 백제성으로 도망친 유비는 매우 수치스러워하고 크게 노하며 '내가 육손에게 꺾이고 치욕을 당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라고 외쳤다고 합니다.